[이 아침에] 마음의 주름살을 펴는 법
“얘! 오랜만에 만났는데 마스크 좀 벗어봐.” “마스크는 왜? 안 돼.” “안 되긴 왜 안 되는데, 잠깐만 벗어봐 예쁜 얼굴 좀 보자.” “예쁘긴 뭐가 예뻐, 다 늙어빠졌는데.” “그래도 너는 나보다 젊잖니.” “젊으면 뭐 주름살이 피해 가나, 얼굴이 자글자글한 데.” 90세 된 선배 언니가 80대 중반을 지나는 후배에게 마스크를 벗으란다. 주름살 보이기 싫어 못 벗겠다는 후배는 선배의 집요한 설득과 강요에 결국 마스크를 벗으면서 말했다. “봐 주름 많잖아.” 주름살 실랑이를 옆에서 듣는데 불똥이 나에게 튈 것 같았다. 얼른 자리를 피하는 데 아니나 다를까 후배는 고개를 돌리면서 나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목사님! 나 주름 많죠?” 있는 주름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나이 들면 주름이 다 생긴다고 해봐야 정답은 아닐 것 같아 그냥 못 들은 체하고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나의 몸은 이미 반쯤 움직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도외시되었지만,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후배는 도망칠 곳도 없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 “얘! 나 주름 많지?” 무슨 답이 나올지 자못 궁금해 내빼던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기습 질문을 받은 후배의 난처해 하는 마음이 몇 발짝 떨어진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일찍 빠져나오길 잘했지’ 하면서 답을 기다리는데 ‘그놈의 주름살이 뭐길래’라는 생각 때문에 머릿속에 주름이 잡혔다. 사실 주름살 좀 있다고 그리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주름살이 인생의 품위와 경륜이라고, 웃음과 울음이 빚어낸 삶의 흔적이요 세월이 만든 작품이라고 말한들 주름살을 반가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얼굴에만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주름살은 또 어쩔 것인가? 인생길에 마주치는 좌절과 실패가 상처가 되어 마음에 주름 한 줄을 더 새겼고, 오해와 편견이 또 하나의 깊은 주름살을 마음에 수놓았다. 이민 생활의 갑갑함이 스트레스가 되어 마음의 잔주름을 그었고, 사고와 재해, 갈등과 다툼을 겪을 때마다 짙은 주름살이 마음속 깊이 자리를 잡았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주름을 싫어했다. 손빨래한 옷감을 다듬잇방망이로 두들겨 주름을 폈다. 숯을 올린 조그만 쇳덩이가 옷감 사이로 휘젓고 다닐 때면 아무리 심하게 구겨졌던 옷이라도 반듯하게 펴졌다. 우리 조상들은 없는 살림에도 옷과 이불 홑청의 주름을 펴면서 삶의 주름도 함께 펴지기를 바랐다. 얼굴의 주름살은 수술로 펴고, 구겨진 옷감은 다듬이질로 펼 수 있다면 마음의 주름살은 어떻게 펼 것인가? 이민 생활이라는 다듬잇돌 위에 위태롭게 선 인생에 고난이라는 방망이가 사정없이 내리칠 때가 있다. 아프지만, 참다 보면 그 방망이질이야말로 인생의 주름을 펴는 흥겨운 가락이 된다. 세월이 아로새긴 마음속 주름살이 고난의 다듬이질로 펴질 때쯤이면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더 잘 알게 된다. 철이 드는 게다. ‘얘! 나 주름 많지?’ 아까 주름살 실랑이에서 선배의 난처한 질문을 받은 후배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눈이 안 좋아서 잘 안 보여.” 그렇다, 얼굴이나 마음에 새겨진 주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주름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이 문제였다. 주름살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적당히 눈감고 살다 보면 마음의 주름살도 넌지시 펴질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주름살 마음 마음속 주름살 주름살 실랑이 사실 주름살